본문 바로가기

스마트컨슈머 라이프/문화탐방

[연극]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국내도서>비소설/문학론
저자 :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 이연희역
출판 : 종합출판범우(BW범우) 2010.02.10
상세보기

서사극에서 서사는, 하나의 이야기 방식으로, 사건을 객관적이고, 감성적이지 않게, 역사적인 것으로 제시하는 방식이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감정교류, 동화작용, 그리고 카타르시스(katharsis)를 중시했지만 서사극에서는 극에서의 이성, 판단, 객관성을 중시한다. 그런 면에서 서사극은 비(非)아리스토텔레스적이라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극작가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1956)의 서사극은 '낯설게 하기(Verfremdung)'라는 기법을 중추로 한다. '낯설게 하기(Verfremdung)'는 명백하고 잘 알려진 그리고 분명한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 놀라움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연극적 시도들의 통칭이다. 이전의 연극에서는 관객으로 하여금 연극을 마치 실제처럼 느끼도록 실제와 같은 무대와 인물 등을 재현하는데 주안점을 두었지만, '낯설게 하기(Verfremdung)'는 관객이 극장 안에 앉아 있음을 잊지 않도록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브레히트는 무대에서의 사건은 어디까지나 연극적인 것이지 사실 그 자체나 현실일 수는 없다고 말했다.

브레히트의 서사극은 관객이 작품에 맹목적으로 몰입되는 것을 경계하고 관객으로 하여금 객관적인 외부적 관찰자의 위치에서 공연 내용에 대해 비판 의식을 갖도록 한다. 그의 서사극은 사회 비판과 실천에 대한 지향과 예술에 대한 지향이라는 두 가지 측면을 갖는다. 브레히트의 서사극은 연극의 고유한 자율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연극이 사회와 유리되어 그 의의가 축소되는 것을 지양(止揚)하고자 하는 고민의 산물이다. 그의 대표작인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Mutter Courage und ihre Kinder)'을 통해 그는 혼란스러운 전쟁의 상황에서 굴곡진 삶을 사는 억척스러운 여인과 그 자식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억척어멈이라 불리는 주인공 안나 휘어링은 성이 각기 다른 자신의 세 자식들과 함께 여러 나라를 유랑한다. 전쟁이 벌어지는 나라로 이동하여 생필품을 판매하는 방식으로 억척스럽게 돈을 모으는 것이다. 억척어멈에게 있어 전쟁은 자식들을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을 안겨 주기도 하지만 전쟁을 떠나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는 점에서 두 가지 상반되는 의미를 갖는다. 억척어멈은 결국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용감한 장남 아일립, 성실한 차남 슈바이쩌카스, 그리고 벙어리인 딸 카트린을 모두 잃게 된다. 자식을 모두 잃은 슬픔을 뒤로 한 채 억척어멈은 포장마차를 끌고 또 다른 전쟁터로 향한다.

극단 '그림연극'의 아홉번째 정기공연 '억척어멈'에서 브레히트의 서사극이 지닌 여러 특징들을 확인할 수 있다. 뒤쪽 중앙의 슬라이드를 통해 각 장의 시놉시스가 사전에 전달됨으로써 연극적 사건에 대한 긴장감이 해소된다. 무엇무엇에 관한 노래를 들려주겠다는 배우의 소개에 이어 등장하는 각종 노래들은 연극적 환상을 파괴함으로써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 특히 벙어리인 딸 카트린의 노래는 그녀가 실제로는 벙어리가 아니고 단지 벙어리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일깨워줌으로써 관객의 몰입을 적절하게 차단한다. 극중극으로 등장하는 인형극, 그림자극, 그리고 3D 애니메이션을 통해 관찰자로서의 관객의 위치를 거듭 확인시켜 주기도 한다.

현대연극에 이르러 장르간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다양한 기법이 연극에 도입되는 점을 감안하여 실험적으로 컴퓨터 그래픽을 사용한 점이 신선하다. 원작이 12장으로 구성되어 있음에도 공연이 지루하지 않도록 과감하게 5, 6, 7장을 3D 애니메이션으로 압축함으로써 100분 내외의 적당한 공연 시간을 유지하고 있다. 3D 애니메이션을 통해 아바타가 지도위를 걸어다니는 모습은 이해를 쉽게 함과 동시에 사건의 흐름을 객관적으로 제시하는데 있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역할을 수행한다. 특히 이러한 동영상이 막사 위에 투사됨으로써 막사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연극에서 사용되는 소품의 하나라는 것을 관객에게 보여줌으로써 브레히트의 '낯설게 하기(Verfremdung)' 기법에 충실하다.

딸의 말을 모두 알아들을 수 있다는 호언장담이 무색하게 딸의 몸짓에 담긴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억척어멈의 모습에서 사람들간의 의사소통의 단절과 그에 대한 무지가 드러난다. 자식들과 자신을 지키기 위해 돈벌이를 하는 것임에도 돈 몇 푼을 아끼려다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억척스러움 속에서 목적과 수단이 전도된다. 그저 핑계로만 보이는 자질구레한 이유들을 들어 벙어리 딸 카트린의 동행을 거부하는 주방장의 고집에서 냉혹한 이기심을 엿볼 수 있다. 장남의 용감함과 차남의 성실함이라는 미덕이 상황에 따라 달리 평가받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자식들을 떠나보내고 궁극적으로는 홀로 쓸쓸히 포장마차를 끄는 억척어멈의 모습에서는 인간의 숙명적인 고독과 마주친다. 전체적인 내용을 통해 전쟁의 참상을 확인하고 이에 대한 비판 의식을 갖게 된다.